퇴사

근황
얼마 전 회사를 나왔다. 작년 3월부터 회사의 시작을 함께했으니 거의 1년 반 만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많은 일을 겪었다.
- DeepSeek R1이 나왔을 때 영감을 얻고 시작한 AI 수학 튜터 서비스를 만들고 매각했다
- 요즘 SF에서 가장 유행하는 “AI 비즈니스 빌더”앱을 1년전에 먼저 만들었었다
- 오픈소스를 빌드해서 스타 수 4천개라는 꽤 값진 트랙션을 얻었다
- 미국에서 B2C 앱을 2개 출시했고 한 때 우리 제품이 해커뉴스 상단에 노출되기도 했다 (Atlas 런칭 영상을 보면 해커뉴스 페이지에서 데모를 하는데 거기서 우리 제품 소개글이 보인다)
-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잘하는 AC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투자도 받았다
- 한국에서 나고 자란 파운더 출신으로 YC 인터뷰까지 갔다 왔다. 원래는 줌으로 했었던 인터뷰가 우리 배치때부터 오프라인 인터뷰가 확대되면서 SF까지 인터뷰를 하고 왔다.
- 서비스를 만든지 2개월만에 팀이 인수제안을 받았다. 그것도 꽤 큰 금액으로
- B2C 앱부터 B2B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까지 개발하고 런칭해봤다
- B2B 사업을 하면서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한 고객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창업과 개발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경찰 출신의 내 주변에 이제는 창업가와 개발자가 수두룩하다. 스스로의 성장을 차치하고서라도 내 주변이 정말 많이 바뀌었음을 체감한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요?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다. 다음을 정해두고 한 퇴사가 아니어서 당분간은 새 일을 크게 벌이기보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창업하면서 놓쳤던 것들도 되찾고 싶다. 특히 주변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과 건강이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압도되기보다 앞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에 흥미와 호기심을 유지하려고 한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도 몇 가지 방향은 정했다.
- 더 이상 B2B, 특히 B2B 소프트웨어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 B2B 소프트웨어의 주요 해자는 데이터와 유통 네트워크다. AI 시대에는 제품만으로 지속적인 차별점을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해자를 만들 만한 네트워크도 없고, 데이터를 소유할 수 있는 기존 유통망도 없다. 결국 정석대로 제품을 만들고 영업하며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 그런데 그 과정이 나에게는 재미가 없었다. CRM, ERP, ATS처럼 누구나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면 더 그랬다.
-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도전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다. 특히 AI와 소프트웨어 분야는 변화가 너무 빨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기술력과 트랙션을 만들고 빅테크에 매각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5년, 10년을 지속하기 어려워 보인다. 시장의 창이 빠르게 닫힐 수 있다는 조급함이 판단을 흐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 제품 개발보다 고객 확보에 집중하려고 한다.
- B2B SaaS와 딥테크 쪽을 제외하면 지금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분야는 IP, 커머스, 플랫폼 정도일 것이다. 모두 B2C에 가깝고 제품뿐만 아니라 고객 확보, 즉 마케팅이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AI로 마케팅의 많은 부분을 자동화하고, 그 과정을 조직의 지식으로 저장하고 관리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일이다. 세 분야에서 하나씩 아이디어를 잡아 빠르게 테스트해 보려고 한다.
- 이는 단순히 AI로 마케팅을 자동화하겠다는 정도의 목표는 아니다. 내 가설은 확산되는 콘텐츠에는 특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사람이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그 패턴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면, 이제는 AI를 통해 공식화하고 조직의 지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정리되면 실험 결과도 한 번 공유해 보려고 한다.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고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가끔은 불안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럴 때일수록 신중하되 조급해하지 말자고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다.